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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75주년 기획 ‘명장’은 대한민국을 구한 장군들의 ‘가장 빛나던 순간’을 조명합니다. 총체적 난국을 타개하고 전황을 뒤집은 리더십의 성공 비결을 알아봅니다.




미국 제18대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 대장. 미 육군



누가 대통령의 단잠을 깨울 것인가?

가장 깊은 밤 새벽 네 시. 펜타곤에서 밤을 새운 미 육군참모총장 로턴 콜린스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한반도 상황이 화급을 다툰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대통령 재가가 필요한 상황인데, 해리 트루먼 대통령은 하반기 채용 일정 지금 자고 있을 시간이다. 대통령을 깨워야 할까, 아니면 몇 시간 기다렸다가 아침에 보고할 것인가.
보고 방식도 문제였다. 참모총장이 합동참모본부와 국방장관을 무시하고 대통령에게 직보할 정도로 위급한 상황인가, 아니면 합참 구성원(합참의장+3군 참모총장)에게 내용을 먼저 공유한 후 계통을 밟아 대통령에게 알릴 것인가. 여러 가지 생각이 새희망홀씨 오갔지만, 콜린스는 이런저런 사정을 따질 여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그리고 수화기를 들어, 펜타곤 다른 사무실에서 대기하던 육군장관 프랭크 페이스에게 전화를 걸었다. “대통령님께 바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 트루먼이 머물던 블레어하우스(백악관은 당시 공사 중)에 전화벨이 울린 시간은 오전 4시 57분이다. 트루먼은 그날 새벽 자기가 기업경기조사 군통수권자로서 결정할 일이 있을 것 같다는 예감 때문에 일찍부터 깨 있었다. 이미 면도까지 마친 상태였다. 육군장관 전화를 받은 트루먼은 잠시도 머뭇거리지 않았다. “더글러스 맥아더의 요청대로, 한반도에 육군 1개 연대전투단(정규 보병연대+소규모 부대)을 즉시 투입합시다. 그리고 몇 시간 안에 2개 사단 추가 방안을 결정하겠소.”

우체국 희망적금 서류

중공군의 한반도 개입이 본격화한 1950년 12월 16일, 한국전쟁에 본격 참전하기 위해 국가비상사태 선언에 서명하고 있는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 미 국립문서관리청



“딘(애치슨), 우린 무슨 일이 있어도 저 나쁜 자식 마술카드 들을 멈춰 세워야겠네.”

(북한의 남침이 전면전이란 사실을 보고받은 해리 트루먼의 반응)


순식간에 결정된 지상군 투입
이때가 1950년 6월 30일 오전 5시(미 동부시간)다. 미 지상군의 한반도 투입은 이렇게 새벽녘에 급박하게 결정됐다. 6·25 전쟁 초반 미국의 가장 결단력 있는 조치였던 ‘육군 파병 승인’은 불과 네 시간 만에 최단 경로(극동사령관→육군참모총장→육군장관→대통령)를 통해 이뤄졌다. 개전 후 제한적 해·공군 작전만 수행하며 한국을 간접적으로 돕던 미국은 이 결정을 통해 한국전쟁에 깊이 발을 들인다.
이 신속한 결정 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한 인물이 바로 당시 육군참모총장 콜린스다. 콜린스는 워싱턴의 트루먼과 극동의 맥아더를 이어주는 고리였다. 맥아더는 6월 29일 한강 남안 진지(현재의 영등포·신길동)를 방문해 국군의 방어 상황을 점검한 후, 한국만의 힘으로 이 전쟁을 절대 이길 수 없음을 간파했다. 맥아더는 당일 도쿄에 복귀해 2,000자에 이르는 긴 전문을 펜타곤에 보냈는데, 여기서 그는 “한국군이 반격 능력을 상실한 채 무너지고 있다”며 “현재로서 유일한 방안은 한반도 전투 지역에 미 지상군 부대를 보내는 것”이라고 결론 냈다. 맥아더의 제안은 △지금 즉시 2,200명 규모의 연대전투단을 투입하고 △다음으로 신속한 반격을 위해 2개 사단(일본 주둔)을 증원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해공군 작전만으로 한국전쟁에 간접 개입하겠다는 기존 미 정부 방침을 완전히 뒤집는 것이었다. 지상군 투입은 야전사령관이나 육군참모총장 차원에서 결정할 일이 아니었다.



1950년 7월 미 육군 파병 병력의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24사단 21연대 1대대)가 부산에 도착해 이동하고 있다. 위키미디어 커먼즈


지상군을 투입한다는 것은 미군이 직접 싸우는 ‘미국의 전쟁’으로 사태를 격상한다는 의미다. 통상 이런 결정을 하려면 대통령이 국무·국방부와 긴밀한 논의를 거치고, 의회 지도자들의 공감을 얻는 기나긴 사전정지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의 전황은 시시각각 나빠지고 있었다. 개전 당일 개성, 26일 문산, 27일 의정부·춘천·강릉, 28일 서울이 떨어졌다. 정상적 논의를 거쳐 몇 주 후 미 지상군 투입을 결정해 본들, 그때는 한반도에 지킬 땅이 남아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한국이 무너지고 있다는 맥아더의 암울한 보고가 펜타곤에 접수된 시간은 6월 30일 오전 1시(현지시간)였다. 기다릴지, 지금 즉시 행동을 개시할지를 콜린스가 결정해야 했다. 전문을 읽은 콜린스는 즉시 참모들을 소집하고 두 시간 후 극동사령부와 원격회의를 열어 직접 맥아더의 의견을 들었다. 한반도의 심각한 상황을 보고받은 콜린스는 맥아더에게 “30분 안에 대통령 허가를 받을 수 있도록 최대한 서두르겠다”는 말을 남기고 회의를 끝냈다. 그리고 육군장관을 통해 트루먼을 설득했다. 콜린스의 신속 조치와 트루먼의 빠른 결단 덕분에 바로 다음 날인 7월 1일 미 육군 첫 파병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부산에 도착했다. 앞서 남침 계획을 짤 때 소련과 북한은 ‘미군 지상군 증원이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은 걸릴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실제 미 육군 병력은 개전 1주일 만에 한반도에 배치됐다.



6·25 개전 후 열흘간 급박한 상황. 강준구 기자


전쟁사를 보면 새벽이나 야간의 긴박한 상황에서 최고사령관 혹은 군 수뇌부를 감히 깨우지 못해 골든타임을 날려버린 사례가 종종 있다.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서부전선을 방어하던 독일군은 히틀러(자기 명령 없이는 주요 부대 이동을 금지했다)의 아침잠 때문에 기갑부대 투입 시기를 놓쳐 연합군 상륙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 6·25 개전 당일 아침 국군 총참모장 채병덕은 국방장관 신성모에게 전화를 걸었으나 연락을 받지 않아 그 긴박한 때에 직접 장관 관사까지 지프를 타고 달려가야 했다.
그에 비해 지상군 투입 결정 당시 미 정부의 대응은 흠잡을 곳 없이 매끄러웠다. 극동사령관 맥아더는 최전방을 직접 방문해 전투 상황을 눈으로 확인한 뒤 본국에 가감 없는 정보를 신속하게 전달했다. 육군참모총장은 현지 사령관 보고에서 긴급함을 감지하고 새벽에 대통령을 깨워 직보하는 용기를 발휘했고, 잠을 줄이며 기다리던 대통령은 현지 사령관과 육군 수뇌부의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며 신속하게 군사행동의 길을 열어줬다.
미 지상군 투입에 콜린스가 기여한 것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6월 25일 오후 7시 45분(현지시간), 개전 이후 처음 열린 미 정부 대책회의(1차 블레어하우스 회의)에서도 콜린스는 “한국군이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면 미 지상군이 필요할 것”이라는 발언을 했는데, 이는 미 정부 고위관계자 중 처음으로 육군 병력 투입을 언급한 사례였다.



한반도 개입을 결정한 1950년 블레어하우스 회의. 박종범 기자



“주사위는 던져졌다. 미국은 역사상 최초로, 미국인들이 거의 들어본 적도 없는 극동에서 전쟁에 휘말렸다.”

(미 지상군 투입 결정 후 콜린스의 소감)


6·25 미군 물량전의 설계자
우리에겐 생소한 이름이지만 로턴 콜린스는 6·25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1949년 8월부터 1953년 8월까지 4년간 미 육군참모총장이었는데, 한국전쟁(1950년 6월~1953년 7월) 내내 미 육군을 책임진 최선임 장교였다. 6·25 당시 △미 지상군 파병 병력의 투입·증원·교대 △장교 인사이동 △유엔군에 대한 군수 보급 △한국군 장비 지원과 교육 등이 모두 콜린스의 책임 아래 이뤄졌다는 얘기다. 공산군의 머릿수를 화력으로 압도한 유엔군의 ‘물량전’을 설계·가동한 인물이 바로 콜린스였다.
콜린스는 야전과 행정 양쪽에서 모두 탁월한 재능을 인정받은 보기 드문 군인이다. 2차 대전 발발 후 콜린스는 먼저 태평양 전선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942년 솔로몬 제도 과달카날 전투에서 25사단장으로서 군사적 수완을 발휘해 ‘라이트닝 조(Lightning Joe)’라는 별명을 얻었다. 과단성 있고 신속한 결정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는 의미다. 이후 유럽전선으로 이동해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서 미군 선봉인 7군단을 이끌고 유타 해변(가장 서쪽)에 상륙했고, 곧이어 항구도시 셰르부르(쉘부르) 공략을 성공시켜 연합군 보급항을 확보하는 공을 세웠다. 이후 휘르트겐숲 전투와 벌지 전투(아르덴 대공세)에서 활약을 이어간다. 전후에는 워싱턴으로 불려가 육군참모차장을 거쳐 1949년 미 육군 최고 자리(참모총장)까지 승진했다.
콜린스는 2차대전 당시 유럽과 태평양 전선 양쪽에서 모두 싸웠던 세 명의 미군 장군 중 한 명이고, 양대 전구에서 큰 전공을 세운 거의 유일한 장군이다. 당시 7군단 휘하 연대장 중에 제임스 밴플리트 대령이 있었는데, 밴플리트의 공격 정신을 높이 산 콜린스가 나중에 밴플리트를 매슈 리지웨이 후임 8군사령관으로 발탁하기도 한다.



로턴 콜린스 이력. 송정근 기자



“2차대전 당시 공격적으로 맹렬하게 싸웠던 장군. 유럽과 태평양 전선의 핵심 전투에서 미군을 승리로 이끌다.”

(콜린스 사망을 알린 워싱턴포스트 부고 기사)




1943년 8월 남태평양 뉴기니 전선에서 현장 시찰을 하고 있는 로턴 콜린스 미 25사단장. 미 육군



6개월간 네 차례 한국 순시
미 육군참모총장이라면 펜타곤 사무실에 들어앉아 세계 각지에서 올라오는 보고를 통해 현장 사정을 파악하며 행정이나 대통령 군사 보좌에만 몰두했을 것 같지만, 6·25 당시 콜린스는 유독 한국을 많이 찾았다. 당시 미국은 본토뿐 아니라 유럽, 필리핀, 극동, 카리브해 등 세계 전역에 육군 병력을 보내고 있었는데, 육군참모총장이 특정 국가를 자주 시찰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
물리적으로도 한국 방문은 간단치 않은 여정이었다. 당시 미 동부에서 한국까지 오려면 미 서부→하와이(또는 알류산 열도)→도쿄 등 서너 군데 중간 기착지를 거쳐야 했다. 워싱턴에서 한국까지 편도 이동 시간만 꼬박 이틀 정도가 소요됐다.
그럼에도 콜린스는 전쟁 고비마다 워싱턴에서 한국으로 날아와 최전방을 직접 확인하며, 트루먼 대통령의 눈과 귀 노릇을 했다. 한국에서 보고 들은 것을 대통령과 합참에 전달해 필요한 조치를 이끌어냈다. 콜린스 스스로가 뛰어난 야전사령관이자 훌륭한 군사행정가였기에, 짧은 시찰만으로도 전황의 핵심을 간파하고 현 상황에서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를 알아챌 수 있었다.



6.25 초 로턴 콜린스의 네 번의 결정적 방한. 박종범 기자


특히 1950년 7월 중순부터 이듬해 1월 중순까지 6개월간, 그는 네 차례 한국을 찾았는데 모두 전쟁의 무게추가 한쪽으로 확확 쏠리는 급박한 시기였다. 첫 방한은 1950년 7월 13일이었다. 그 때는 국군은 물론이고 새로 투입된 미군마저도 속절없이 남쪽으로 밀리는 중이었다. 미군 첫 도착 부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가 북한군에 밀려 패퇴(7월 5일)했고, 국군과 미군은 충주(7월 7일)와 천안(7월 8일)을 내줬으며, 미24사단 잔여 병력이 겨우 금강 지역에 방어선을 형성(7월 12일)하고 있었다. 미국이 전쟁을 계속 수행할 수 있을지, 한반도를 포기해야 하는 게 아닌지, 방어가 가능하다면 전세를 뒤집기 위해 얼마만큼의 지상군 병력이 필요할 지를 신속하게 결정해야 했다. 그걸 직접 현장에서 판단하기 위해 참모총장 콜린스가 극동으로 급파됐다.
원래 콜린스는 도쿄 극동사령부만 방문해 맥아더(유엔군사령관)와 월튼 워커(8군사령관)의 보고만 받고 워싱턴으로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시간이 남자 계획을 바꿔 한국행을 결심했다. 그때 콜린스가 이용했던 여객기 DC-3의 항속속도는 시속 300㎞를 겨우 넘었다. 그래서 도쿄 하네다 공항에서 대구(8군사령부) K-2비행장까지 편도 6시간이 걸렸다. 힘들게 한국에 도착한 콜린스는 대구에서 8군 소속 지휘관과 참모들로부터 현장 보고를 받았다. 한국에 머문 기간은 한 시간에 불과했지만, 미 육군 최고위 장성이 전선까지 날아와 직접 부대를 시찰했다는 것은 미군과 국군에게 매우 긍정적인 신호를 줬다. 콜린스 본인도 회고록에서 “일본에서 한국을 오가며 비행기 창을 통해 파악한 한국의 산악지형 덕분에, 우리 장병들이 어떤 전장을 맞닥뜨리고 있는지를 알게 됐다”고 썼다. 미국으로 돌아간 콜린스는 트루먼에게 “즉시 한반도에 병력을 증원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트루먼은 이를 받아들였다. 이후 1기병사단(7월 18일), 2보병사단(7월 31일), 1해병사단(7월 31일) 등 미 정예사단이 속속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전 당시 미군 수뇌부 관계도. 송정근 기자



월튼 워커의 유일한 후원자
콜린스의 두 번째 방한은 한 달 후인 1950년 8월 22일이다. 이때 콜린스는 인천상륙작전 관련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에 왔다가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는 낙동강 전투가 한창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남북으로는 낙동강, 동서로는 왜관~영천~경주에 직사각형 형태 방어선을 치고 북한군을 치열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이때 콜린스는 현장에 좀 더 시간을 할애해, 미 육군의 모든 사단(2·24·25·1기병)과 국군 1사단(다부동)을 찾아 최전방을 둘러봤다. 당시 콜린스를 만난 국군 1사단장 백선엽은 “나는 하루하루를 싸우느라 이 전투가 그렇게 중요한지 알지 못했지만, 워커 사령관과 콜린스 대장까지 사단을 방문하여 격려해 주는 것을 보고 이 전선이 막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회고했다.
당시 콜린스가 결정해야 했던 또 다른 문제는 워커의 경질 여부였다. 맥아더는 워커의 능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8군사령관을 바꾸려 했고, 7월에 콜린스 대신 한국을 순시한 리지웨이 중장(합참 작전부장)의 생각도 교체 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낙동강 전선에서 워커를 직접 만난 콜린스는 워커의 투지와 예비대 운용 능력 등을 높이 평가했다. 그리고 워커의 지휘 아래 미군과 한국군이 이 교두보(낙동강 전선)를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콜린스는 미국으로 복귀해 대통령, 국방장관, 합참에 ‘워커와 한미 연합군을 신뢰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결국 워커는 콜린스의 기대에 부응해 낙동강 방어선을 지켜냈다. 콜린스는 워커가 인천상륙작전의 대안으로 제시한 군산상륙작전에도 공감을 표시했다. 미 군부 내에 별다른 인맥이 없었고, 유럽 전선 출신이라는 이유로 맥아더 사령부에서 소외됐던 워커에게 힘을 실어 준 유일한 군 수뇌부가 콜린스였다.
세 번째 한국 방문은 중공군 개입 이후인 12월 4일이다. 중공군 2차 공세가 시작(11월 25일)되자 미군이 청천강 이남으로 후퇴(11월 28일)하고, 미 해병1사단이 장진호에서 포위(11월 27일)돼 전멸 위기에 몰려 있을 때다. 향후 방어전략을 논의하고 현장 부대의 사기를 확인하기 위해 다시 콜린스가 한국으로 왔다. 워싱턴에선 한반도 철수 주장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있었다. 이때도 콜린스는 “서울을 잠시 잃을 수 있겠지만, 후퇴해서 전열을 가다듬은 후 다시 반격할 수 있다”는 워커의 말을 믿고, 다시 워커에게 힘을 실어주기로 한다. 워커는 19일 후 전방부대 시찰 중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 약속을 지킬 수 없었지만, 후임인 리지웨이가 워커의 ‘일시 후퇴 후 반격’ 작전을 이어갔다.
콜린스는 한 달 후인 1951년 1월 15일 한국을 네 번째로 방문했다. 이때는 중공군 남하, 워커 사망, 흥남 철수, 서울 재함락(1·4 후퇴) 등 암울한 상황이 계속 이어지며 미국이 진짜 한국을 포기하려고 마음먹었을 시점이다. 당시 한미 양국 군 수뇌부의 보고나 발언들을 보면, 낙동강 전투 때보다 이때 전황이 더 절망적이었다. 미 합참은 한국에서의 병력 철수를 심각하게 검토 중이었고, 낙관주의자 맥아더마저 ‘철수’라는 표현을 입에 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국을 방문한 콜린스의 보고는 미국의 향후 한반도 정책에 결정적 영향을 줄 수 있었다. 콜린스의 말 한마디에 철군(한국 포기)이 결정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콜린스는 한국에서 희망을 먼저 보려고 했다. 워커 후임 리지웨이가 1·4 후퇴 11일 만에 공격작전(1월 15일 울프하운드 작전)을 실시하는 것을 목격했고, 미8군과 국군 장병들의 사기를 직접 확인한 뒤 충분히 전쟁을 계속할 만한 상태라고 확인했다. 그리고 한국 순시 직후 이런 전문을 합참에 타전했다.
“방금 한국에서 도쿄로 돌아왔습니다. 8군의 상태는 괜찮고, 리지웨이의 지도력 아래에서 날마다 개선되고 있습니다. 사기도 매우 만족스럽습니다. 한국군이 중공군을 두려워하긴 하지만, 여전히 북한군을 상대하기엔 충분합니다.”
나중에 콜린스는 “(나의) 이 보고가 있고 나서, 1950년 11월(중공군 본격 참전) 이후 미국 정부에서 계속되어 온 비관론이 처음으로 사라졌다”고 회고했다. 콜린스의 자신감 넘치는 보고를 받은 미국 정부는 한반도에서 전쟁을 계속해 나가기로 결정했다.

“나는 낙동강 전선 시찰 중에 봤던 한국인 남성의 모습을 절대 잊지 못한다. 이제 젊지도 않은 그는 지게에 쌀 두 포대를 얹고 있었는데, 그 쌀포대 위에 주름이 쪼글쪼글한 그의 어머니가 앉아 있었다.”

(콜린스의 한국전쟁 회고록 ‘War in Peacetime’)




1951년 10월 강원 양구군 펀치볼에서 미군과 국군 수뇌부가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로턴 콜린스 미 육군참모총장,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사령관, 제임스 밴플리트 8군사령관, 클로비스 바이어스 10군단장, 백선엽 국군 1군단장. 위키미디어 커먼즈



한국전쟁을 마무리한 콜린스
1951년 5월 이후 전선이 교착상태(고지전)에 빠지고 같은 해 7월 휴전협상이 시작된 이후, 콜린스가 힘을 쏟은 것은 한국군 병력 증강 작업이다. 한국군 사단 확충 및 교육 강화 방안은 리지웨이 후임 8군사령관인 밴플리트가 주도했고, 육군참모총장 콜린스가 워싱턴에서 힘을 실어주는 구도로 진행됐다.
콜린스는 밴플리트의 육사 2년 후배였지만, 2차대전(군단장-연대장)과 한국전쟁(참모총장-야전사령관)에서 두 차례 밴플리트의 상관으로 일하며 용장 밴플리트의 진가를 확인했다. 1952년 7월 콜린스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밴플리트가 국군 사단 증강을 건의하자, 콜린스는 밴플리트의 구상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이후 콜린스는 국군 병력 증원 문제를 합참에 들고 가서 논쟁 끝에 관철시켰고, 결국 같은 해 9월 미 합참은 한국 육군과 해병대를 46만 명까지 증원하는 방안을 트루먼에게 건의했다. 당시는 국군이 미군 통제를 받고 있었고, 병력을 늘리려면 현실적으로 미국의 재정·장비 지원이 필수적이었다. 트루먼이 이 계획을 승인하면서, 한국 정부는 미국 지원을 받아 병력 증강 작업에 본격적으로 나설 수 있었다.
콜린스는 한국 복무 경험이 없어 국내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장군이다. 그러나 6·25 기간 내내 ‘세계 최강 육군의 최고경영자’로서 병력·무기·물자·인사 등을 매끄럽게 관리하며 미국의 거대한 국력이 한반도에 제대로 투사될 수 있도록 관리했다.
지금도 “현장에 답이 있다”며 현장 중심 경영을 강조하는 조직들이 많다. 그러나 △현장 의견을 진심으로 경청하고 △단순히 현장 말을 듣는 게 아니라 현장 시선에 왜곡·편견이 없는지를 종합적으로 확인하며 △현장 보고의 역동성에 거시적 관점을 더해 완성도를 높여주면서 △현장을 존중한 결과에 대한 책임까지 직접 지려는 ‘진짜 현장형 리더’를 찾아보긴 어렵다. 그런 면에서 콜린스는 맥아더, 워커, 리지웨이, 밴플리트의 의견이 신속하게 대통령에게 전달될 수 있도록 노력했고, 현지 사령관의 의견에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해 반복해서 최전선을 찾는 수고를 거르지 않았다. 6·25 과정에서 큰 기여를 했으면서도 한국에 있지 않았다는 이유로 가장 조명받지 못한 미군 장군이 아마 콜린스일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한국에 올 때마다 애써 희망을 보려 했다는 점에서 다른 미군 장군들과 달랐다. 전쟁 초반 여러 차례 한국을 순시한 콜린스는 ‘미군과 국군이 한반도에서 잘 싸우고 있으며 이 전쟁이 승산이 있다’는 점을 미 대통령, 국방장관, 의회에 반복해서 전달했다. 2차대전 영웅 출신의 육군참모총장이 최전선을 직접 시찰하는 수고를 감수하며 보고한 내용을 미 행정부와 의회가 쉽사리 거부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의미에서도 콜린스는 미국이 6·25에서 한국에 대한 지원을 계속 이어나갈 수 있게 해 준 숨은 공로자 중 한 사람이다.

◆기사에 참고한 자료

<로턴 콜린스의 행적>
-J. Lawton Collins ’War in Peacetime’
-J. Lawton Collins ‘Lightning Joe’
-Gary Wade ‘Conversations with General J. Lawton Collins’
-백선엽 ‘군과 나’

<여타 인물들의 행적>
-Paul Braim ‘The Will to Win’
-Stephen Taffee ‘MacArthur’s Korean War Generals’

<미 행정부의 의사 결정 과정>
-Allan Millet ‘The War for Korea 1950-1951’
-Clay Blair ‘The Forgotten War’
-Joseph Goulden ‘Korea The Untold Story of the War’
-Omar Bradley ‘A General’s Life’

이영창 논설위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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